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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서 전하는 말 · 읽는 데 23분

형제 장례식 추도사: 형제자매를 위한 예문 6편과 기본 틀

형제 장례식 추도사를 위한 쉬운 다섯 부분 틀과 전문 여섯 편. 손위와 손아래 형제자매, 긴 투병, 갑작스러운 이별, 중독, 오래 멀어진 사이까지 담았습니다.

글: Goodbye App 팀 · 2026년 9월 30일

여자아이와 빨간 모자를 쓴 그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풀이 난 길을 걸어가는 뒷모습
사진: Rahul Genie, Pexels

형제 장례식 추도사를 맡게 되셨다면, 이 글에 있는 쉬운 다섯 부분 틀부터 시작한 다음 그 틀로 쓴 추도사 전문 여섯 편에서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쓰세요. 빈 종이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자동차 뒷좌석입니다. 누가 창가 자리를 차지했는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긴 귀성길을 버티려고 둘이 무슨 놀이를 했는지. 장례식에 온 사람 가운데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말하는 동안에도 눈으로는 부모님을 살피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래에는 장례식 추도사 전문 여섯 편이 있고, 편마다 왜 마음에 닿는지 짧은 설명을 붙였습니다. 여동생이 긴 투병 끝에 떠난 오빠를 위해 말합니다. 오빠가 갑작스럽게 떠난 여동생을 위해 말합니다. 칠십 대 후반의 여성이 평생을 함께한 언니를 위해 말합니다. 동생이 오랜 세월 중독을 안고 살았던 형을 위해 말합니다. 여동생이 사이가 멀어졌던 오빠를 위해 말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부모님이 말씀하실 수 없어서 대신 섭니다. 여섯 편 모두 같은 다섯 부분으로 지었으니, 내 추도사도 그렇게 지을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만 할 수 있는 말

대부분의 사람에게 형제자매는 평생 가장 오래 이어지는 관계입니다. 둘 중 동생인 쪽이라면 그 관계는 첫 기억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본래대로라면 부모님이 떠나신 뒤에도 아주 오래 이어졌어야 합니다. 그것을 몇 분 안에 담기란 무거운 일이고, 이 추도사를 다른 어떤 추도사와도 다르게 만드는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나입니다. 내 형제자매는 내 어린 시절 안에서 함께 산 아주 드문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같은 집, 같은 규칙, 같은 밥상. 이제 그 일부는 나 혼자만 기억합니다. 장례식에 온 사람 가운데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맨 앞줄에 앉아 계실지도 모릅니다. 살아 계신다면 부모님은 자식을 먼저 보내고 계신 것이고, 내가 하는 모든 문장은 부모님께 가장 먼저 닿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지는 십 대 시절의 밤 외출 이야기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주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한 줄 한 줄 읽어 보면서, 이 말을 어머니 얼굴을 보며 할 수 있을지 물어보세요.

티격태격한 것도 진실의 일부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두 사람이 싸웠다는 것을 알거나 짐작합니다. 화장실을 두고, 텔레비전을 두고, 누구 차례였는지를 두고. 그것을 전부 빼면 나머지 이야기까지 믿기 어려워집니다. 싸움 하나를 다정하게 들려주세요. 할 수 있다면 내가 진 싸움으로 고르세요.

나도 슬픈데 다른 모든 사람을 챙겨야 합니다. 전화를 돌리고, 부모님 곁을 지키고, 음악을 고르고, 문상객을 맞는 사람은 대개 형제자매입니다. 내 슬픔에는 그 밤의 남은 시간만 돌아옵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이 추도사를 시작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주에 집안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면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까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형제 장례식 추도사를 위한 쉬운 틀

준호, 수진, 영자, 동욱, 재현, 민수, 그리고 이들을 위해 말하는 형제자매는 모두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추도사들은 틀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보여 드리려고 이 글을 위해 쓴 것이니, 언덕이나 갈비찜이 아니라 순서를 가져가세요.

형제자매를 위한 추도사는 쉬운 다섯 부분 틀을 따르면 되고, 아래 여섯 편도 모두 이 틀로 지었습니다. 오늘 밤 바로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1. 첫머리. 두 사람이 함께한 장소나 순간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있다면, 그 사실을 꾸밈없이 말하는 것.
  2. 함께한 어린 시절. 둘 다 어른이 되기 전의 이야기 한두 개.
  3.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어른이 된 그 사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 한두 가지.
  4. 나만 알던 것. 그 자리의 사람들이 한 번도 듣지 못했거나, 한 번도 이어 맞춰 보지 못한 것.
  5. 마지막 줄. 그 자리의 사람들이 할 일 하나, 이제 내가 직접 할 일 하나, 아니면 꾸밈없는 감사 인사.

첫 번째 추도사는 이 틀을 이렇게 채웁니다.

  • 첫머리는 차고 뒤 언덕입니다.
  • 함께한 어린 시절은 우체통까지의 달리기 시합입니다.
  •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한빛중학교 수학 선생님입니다.
  • 동생만 알던 것은 그 공책입니다.
  • 마지막 줄은 그 자리의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걸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왜 말하는지로 먼저 고르고, 그다음에 길이로 고르세요. 이름만 바꾸면 어느 추도사든 반대로도 쓸 수 있습니다. 투병 이야기는 암을 앓은 자매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이야기는 남자 형제에게 쓸 수 있습니다. 느리고 고른 속도로 읽으면 아래 추도사는 한 편에 3~4분이 걸립니다. 가톨릭 장례 미사에서는 고인을 기리는 말이 보통 미사 끝 무렵에 들어가고 사제의 허락이 필요하며, 어떤 본당은 길이를 제한하거나 원고를 미리 보여 달라고 합니다. 본당에 일찍 여쭤보세요. 빈소를 지키는 밤이나 장례를 마친 뒤의 모임 자리에서는 더 긴 추도사도 할 수 있습니다.

빈 종이에서 시작하는 방법 전체는 추도사를 단계별로 쓰는 법 안내에 있습니다. 부모님을 위한 추도사를 쓰고 계신다면 어머니 추도사 예문과 아버지 추도사 예시를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암을 앓았던 오빠를 위해, 여동생이

천천히 읽으면 약 3분 30초입니다.

저희 오빠 준호는 제가 여섯 살, 오빠가 열한 살이던 여름에 은행나무길 차고 뒤 언덕에서 제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빠는 안장 뒤를 잡고 뒤에서 달리며 언덕 아래까지 내내 “잡고 있어, 잡고 있어” 하고 외쳤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저는 전봇대를 붙잡고 고맙다고 하려고 뒤를 돌아봤는데, 오빠는 아직 언덕 꼭대기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맨홀 뚜껑에서 이미 손을 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저녁 먹을 때까지 오빠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너한테 필요한 건 내가 잡아 주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잡고 있다고 믿는 거였지”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일렀습니다. 어머니는 참 지혜로운 말이라고 하셨고, 오빠는 일주일 내내 그 일로 으스대서 정말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준호 오빠였습니다. 반은 지혜, 반은 잘난 척. 어느 쪽 반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여름부터 오빠는 저를 전봇대라고 불렀습니다. 제 졸업식에서도 전봇대라고 불렀습니다. 제 결혼식 축사에서도, 하객 백이십 명 앞에서 전봇대라고 불렀습니다. 저희는 몇 년 동안 날마다 대문에서 골목 끝 우체통까지 달리기 시합을 했고, 오빠는 공책에 점수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살쯤 제가 이기기 시작하자 공책이 사라졌습니다. 오빠는 지난 5월 병원에서 그 공책을 제게 돌려주었습니다. 제가 집에 올 때마다 계속 적어 왔던 것입니다. 제가 마흔두 판 앞서 있고, 제가 이긴 판마다 옆에 오빠가 똑같은 말을 적어 두었습니다. 내리막.

오빠는 그 소년에게서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빛중학교에서 이십육 년 동안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분수를 재미있게 만들었고, 자기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았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았습니다. 오빠 자신이 모든 교실의 맨 뒷자리에 앉던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오빠는 마지막 삼 년 동안 암을 앓았습니다. 대기실에서 숙제를 채점했습니다. 간호사마다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마지막 날 오후에도 아주 조용히 저를 전봇대라고 불렀습니다. 지켜야 할 체면이 있었으니까요.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제가 오빠 곁에서 걸었습니다. 병원 복도를 따라, 오빠 집 현관 앞 계단 세 칸을 올라, 8월에는 바다를 보러 방파제를 따라. 제가 오빠 팔을 붙잡고 “잡고 있어” 하면, 오빠는 매번 “거짓말” 했습니다. 그러면 둘 다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걸 둘 다 알았으니까요.

준호 오빠를 위해 한 가지만 해 주시겠다면, 균형을 잃어 가는 누군가를 찾아 주세요. 여러분의 아들, 이웃, 한빛중학교에 새로 온 선생님. 그 사람 곁에서 걸어 주세요. 잡고 있다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오빠와는 달리, 정말로 놓지 마세요.

오빠, 마흔두 판이야. 전부 내리막은 아니었어.

언덕 위의 오후 하나가 추도사 전체를 끌고 가고, 그 오후는 계속 돌아옵니다. 별명으로, 공책으로, 그리고 끝에서 뒤집히는 “잡고 있어”라는 말로. 병은 꾸밈없는 문장 하나만 받고 곧바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자리를 내주는데, 그것이 듣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동생은 오빠의 놀림을 다정하게 되돌려 줍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위해, 오빠가

약 3분 30초입니다. 원인을 말하지 않으므로 어떤 일이 있었든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수진이 오빠입니다. 수진이보다 네 살 많고, 서른네 해 동안 이 집안에서 제가 할 일은 동생과 동생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 사이에 서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는 건 아주 먼 훗날, 나이 든 누군가를 위해서여야 했습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 일을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육 년 동안 아침마다 동생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면서 인도 바깥쪽, 차가 다니는 쪽으로 걸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사는 그쪽으로 걷는 거라고 하셨고, 아홉 살이던 저는 신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앞집 최 씨네 개 앞에서도 동생을 막아섰습니다. 작고 늙은 데다 한 번도 누구를 문 적이 없는 개였지만, 저희 둘 다 그걸 몰랐습니다. 동생이 열다섯 살 때는 첫 남자 친구가 동생을 대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어두운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동생에게는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동생은 제가 아는 가장 유능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서른한 살에 자기 동물병원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이 동네 사람 절반이 겁에 질린 고양이를 종이 상자에 담아 동생에게 건넨 적이 있고, 한때 최 씨네 개를 피해 제 뒤에 숨던 아이는 눈썹 하나만 치켜올려 60킬로그램짜리 개를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화요일부터 사람들이 제가 몰랐던 이야기를 해 주고 있고, 그 이야기들이 지난 팔 년을 보는 제 눈을 바꿔 놓았습니다.

동생 친구 혜원 씨가 알려 주었습니다. 팔 년 전 제가 직장을 잃었을 때, 수진이는 일요일 밤마다 부모님께 전화해서 오빠는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월요일 밤마다 제게 전화해서 정말 잘 지내는지 확인했습니다. 저는 그 월요일 전화가 동생이 오빠를 필요로 해서 거는 전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혜원 씨는 부엌 구석에서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도 하나 해 주었습니다. 어른이 된 뒤로 수진이와 제가 함께 어디를 걸을 때면, 수진이가 슬그머니 저를 인도 안쪽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저는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제 여동생이 저를 위해 바깥쪽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수진이는 자기 안의 가장 좋은 것은 두 분에게서 왔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 말이 맞았습니다. 오늘 제 입으로 그 말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저는 보살핌을 받던 쪽이 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곁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아직 모르고 계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누가 여러분을 위해 바깥쪽에서 걸어 왔는지 알아내시고, 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때 고맙다고 말하세요.

수진아, 이제 오빠가 바깥쪽에서 걸을게. 모두를 위해서.

이 추도사는 일부러 죽음을 한 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묻지 않으며, 이유를 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든 같은 말이 통하고, 그 자리의 누구도 서른네 해가 아니라 하루를 생각하도록 떠밀리지 않습니다. 지켜 주던 사람이 자신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틀려 버린 순서를 사람들이 집으로 품고 갈 수 있는 무언가로 바꿔 놓습니다. 부모님께 하는 말이 짧은 것은 일부러입니다. 부모님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간직할 말을 하나 건넵니다.

평생을 함께한 언니를 위해, 여동생이

천천히 읽으면 3분 30초에서 4분입니다. 일흔여덟 살 여성이 언니를 위해 전하는 추도사입니다.

저희 언니 영자는 저보다 세 살 위였고, 그 사실을 제가 잊게 내버려 둔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일곱 살 때도 그랬고, 지난달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일흔여덟, 언니가 여든하나였는데, 언니는 간호사에게 저를 “우리 집 아기”라고 소개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정반대였습니다. 언니는 깔끔했고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노래를 잘했고, 1957년에 성가대 선생님은 제게 아주 다정하게, 입만 벙긋거리고 소리는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언니는 평생 이 동네, 같은 골목에서, 같은 정육점을 다니며 살았습니다. 저는 열아홉에 서울로 올라갔다가 예순에 돌아왔는데, 언니가 역으로 마중을 나와서 “참 오래도 걸렸다” 했습니다. 언니는 조용한 남자와 결혼했고 저는 시끄러운 남자와 결혼했는데, 둘 다 상대가 끔찍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고, 둘 다 틀렸습니다.

그리고 언니는 일흔여덟 해 동안 제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저희 나이의 자매가 가까이 지내는 건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가까이 지낸 건 언니가 제가 아는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향에 돌아온 뒤로, 둘 다 혼자가 되고 나서는 거의 매주 강둑길을 따라 다리까지 걸었다가 돌아왔고, 가는 내내 말다툼을 했고, 너무 일찍 문을 닫는 찻집에서 차를 한 주전자 마셨고, 문을 일찍 닫는 걸 두고 또 다퉜습니다.

제가 자꾸만 다시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집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언니와 저뿐이었습니다. 돌산길 31번지. 1974년에 헐렸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그 집 안에 들어가 본 분은 거의 없습니다. 비가 오면 대문이 뻑뻑해져서 들어 올리면서 밀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세를 뚜껑에 배 그림이 있는 과자 깡통에 넣어 두셨습니다. 아버지 자리는 아랫목이었고 아무도 거기 앉으면 안 됐습니다. 언니는 아버지가 나가실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한 번도 빠짐없이 들켰습니다. 방석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걸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주 전 호스피스 병동에서 언니가 잠에서 깨더니, 부엌 찬장이 무슨 색이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초록색이라고 했습니다. 언니는 “파란색이었어. 너는 뭘 눈여겨보는 법이 없지”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십 분 동안, 즐겁게, 낮은 목소리로 그 일을 두고 다퉜습니다. 오십 년 전에 사라진 부엌 찬장을 두고 다투는 두 할머니였습니다. 그 다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저희 둘뿐이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남아서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남은 사람이 그 집이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언니와 저만 대답할 수 있던 질문을 제게 가져올 테고, 저는 혼자 대답할 테고, 어떤 날은 틀리게 대답할 겁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 전부 적어 두려고 합니다. 대문, 깡통, 아랫목, 방석. 그리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들려주겠습니다.

언니, 찬장은 초록색이었어. 미안해, 우리 언니. 초록색이었어.

정반대였다는 이야기는 자매 사이의 추도사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두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그 집이 해 줍니다. 이 나이가 되면 한 집안 전체를 기억하는 사람은 형제자매 한 사람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그 집의 작은 물건 세 가지가 사람들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오래된 다툼으로 끝을 맺으면 언니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자리에 머뭅니다.

정원 오솔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나이 지긋한 두 여성의 뒷모습
사진: Maksim Goncharenok, Pexels

오랜 세월 중독을 안고 살았던 형을 위해

약 3분 30초입니다. 어떤 물질인지 밝히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저희 형 동욱은 어른이 된 뒤 거의 평생을 중독을 안고 살았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아시는 일이니, 처음에 말씀드리고 그다음에는 내려놓겠습니다. 그것은 형 삶의 일부였습니다. 형이라는 사람 자체는 아니었고,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먼저 저희 가족과, 곁을 지켜 주신 친구분들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한밤중에 걸려 오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형이 어느 도시에 있는지조차 모르던 해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든 해 동안 형의 이부자리를 늘 펴 두셨습니다. 형을 사랑하는 일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여러분은 이십 년 동안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일에는 아무도 상을 주지 않으니, 제가 소리 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해내셨습니다. 형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형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형은 요리를 할 줄 알았습니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찬장을 다 열어 보고는 양파 반 개, 참치 캔 하나, 찬밥 조금으로 그 집 사람이 계획했던 어떤 저녁보다 맛있는 밥상을 차려 냈습니다. 할머니 부엌에서 배웠고, 평생 요리책 한 번 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늦게까지 일하시는 날이면 형이 저녁을 차렸습니다. 일 년 동안 매일 밤 계란프라이였습니다. 열한 살짜리가 할 줄 아는 건 계란뿐이었으니까요. 형은 제 몫을 접시에 담아 옆에 접은 키친타월을 한 장 놓고는, 웨이터처럼 저를 “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그 뒤로 어느 식당에서도 그렇게 대접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스무 번의 설 동안 갈비찜은 형 몫이었습니다. 어떤 해는 낮 열두 시에, 어떤 해는 네 시에 왔습니다. 한두 해는 아예 오지 않았고, 저희는 시판 양념으로 한 갈비찜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형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온 집 안이 달라졌습니다. 형은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자, 누가 이걸 망쳐 놨어?” 했습니다.

마지막 사 년 동안 형은 역전길 복지관에서 누구든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침을 지었습니다. 형이 밥을 지어 드린 분들 가운데 몇 분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중 한 분이 오늘 아침 입구에서,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기 눈을 똑바로 보며 계란을 어떻게 해 드릴까 물어 준 사람이 형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게 딱 우리 형입니다.

형의 삶이 비극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깔끔하게 끝난 이야기였다고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그것은 형의 삶이었습니다. 힘들었고, 형이 밥을 먹인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번 설에는 이 집안 누군가가 갈비찜을 해야 합니다. 그게 저일 테고, 맛은 영 아닐 테고, 누군가 냄비 위로 몸을 기울이며 “자, 누가 이걸 망쳐 놨어?” 하겠지요. 그러면 아주 잠깐, 그게 형일 겁니다.

세 가지 선택이 힘든 진실을 품위 있게 붙듭니다. 한 번만, 일찍, 사람을 먼저 세우는 말로 이름 붙입니다. 형은 중독을 안고 살았다고. 가족이 지쳐 온 시간에는 문단 하나를 따로 내주어, 가장 많이 짊어진 사람들이 누구도 심판받지 않으면서 그 수고를 인정받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그 사람에게 씁니다. 그의 손, 그의 부엌, 그가 밥을 먹인 사람들. 힘들었던 세월도 이 추도사 안에, 갈비찜 속에 들어 있습니다. 탓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사이가 멀어졌을 때

약 3분입니다. 여러 해 동안 거의 말을 나누지 않고 지낸 오빠를 위해 여동생이 전하는 추도사입니다.

저는 십일 년 동안 재현 오빠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크게 싸운 일은 없었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이 가지 못한 결혼식이 있었고, 다른 도시로 이사한 일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둘 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던 긴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이고, 그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대신 제게는 그 소년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아주 많은 것이었습니다.

오빠는 저보다 두 살 위였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오빠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 마당 끝에 헌 문짝 하나, 나무 팔레트 두 개, 초록색 식탁보로 아지트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들어오면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규칙을 만들었는데, 저는 보초니까 여자로 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섯 번의 여름 동안 보초였습니다. 제 임무는 할아버지가 오시나 망을 보는 것과 과자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 살 때 제가 수두에 걸리자 어머니가 오빠를 제 방에 들여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오빠는 방문 밖에 앉아 《보물섬》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주었습니다. 앵무새까지,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바꿔 가면서요. 아흐레가 걸렸습니다. 오빠는 그 일을 친구들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열 살 때 제가 공을 차서 할아버지 장독을 깼을 때, 오빠는 할아버지께 자기가 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빠는 한 달 동안 용돈을 못 받았고, 그 일을 한 번도 저한테 들먹이지 않았습니다. 싸울 때조차도요.

오빠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는 여기 계신 많은 분들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빠와 함께 조기축구를 하신 분 한 분이, 삼십 년 동안 경기가 끝날 때마다 남아서 의자를 쌓고 문을 잠근 사람이 오빠였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집에 갈 수 있도록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아보았습니다. 제 방문 밖에 앉아 있던 그 소년이 어른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싸움에 관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그 손가락을 받아서 걸어야 했습니다. 그게 법이었습니다. 오빠는 매번 먼저 내밀었습니다. 열다섯 해 동안 매번, 제 잘못일 때도, 그리고 대개는 제 잘못이었는데도요. 저는 한 번도 먼저 내민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빠. 여기 내 새끼손가락. 이번에는 내가 먼저야.

멀어진 사이는 맨 처음 세 문장만 차지하고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그 뒤로 추도사는 그 소년의 것이 되고, 그래서 듣는 사람들도 마음 편히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된 뒤의 기억이 적을 때 증거는 어린 시절에 있습니다. 조기축구 동료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는 오직 그 소년과 그 어른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만 쓰입니다. 끝은 말하는 사람이 아직 직접 할 수 있는 작은 행동 하나입니다. 먼저 내미는 것.

말씀하실 수 없는 부모님을 대신해

약 3분입니다. 누나가 부모님을 대신해 남동생을 위해 전하는 추도사입니다.

제 이름은 지영이고, 민수는 제 남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맨 앞줄에 앉아 계신 저희 부모님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일어서서 말씀하시는 것은 누구도 두 분께 부탁해서는 안 될 일이라, 두 분이 제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분 동안 저는 두 분의 목소리이고, 아주 가끔만 제 목소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은정 씨, 하은이, 지호. 민수는 누구보다 먼저 여러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하는 말은 어느 것도 여러분에게서 민수를 조금이라도 덜어 가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제가 기억하는 한 늘 같은 이야기를 하셨고, 오늘도 그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라실 겁니다. 아버지와의 말싸움에서 이긴 자식은 민수 하나뿐이었는데, 그때 민수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박쥐가 새냐 아니냐를 두고 벌인 말싸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다는 점을 꼭 밝혀 두고 싶어 하십니다. 민수는 다시 있었다고 우겼습니다. 서른아홉 해 동안 명절마다요.

어머니는 늘 민수가 가장 키우기 쉬웠던 아기였고, 어머니가 아는 가장 다정한 남자라고 하십니다.

제가 보탤 수 있는 것은 지난 십 년 동안 민수가 두 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입니다. 제가 곁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민수는 십 분 거리에 살면서 두 분이 무엇 하나 부탁하실 필요가 없게 했습니다. 매달 첫째 토요일이면 부모님 댁 울타리 나무를 다듬었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과자가 무엇인지, 그걸 찬장 몇 번째 칸에 두시는지 알았고, 퇴근길에 목록도 없이 장을 봐 왔습니다. 2월에 눈이 왔을 때는 두 분 중 누구도 커튼을 걷기 전인 아침 일곱 시에 삽을 들고 문 앞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마시고 싶지도 않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뉴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셨고, 민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시게 해 드렸습니다.

어릴 때 민수는 저를 어디든 따라다녔고, 저는 그게 싫다고 노상 투덜댔습니다. 버스 정류장까지, 친구네 집까지, 한번은 치과까지 따라왔는데, 저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대기실에서 한 시간을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 저를 그렇게 따라와 준다면 무엇이든 내주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은 두 분이 키우신 그 사람 때문에 오셨습니다. 두 분이 해내신 일입니다.

두 분을 대신해, 그리고 제 마음을 담아, 민수를 위해 와 주셔서, 이번 달 내내 카드와 반찬과 전화로 마음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일을 부탁받으셨다면 글솜씨보다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형제자매에게 배우자나 반려자, 자녀가 있었다면 장례에 관한 결정은 대개 그분들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분들과 미리 확인하고, 지영이 그랬듯이 그분들의 이름을 일찍 부르세요. 부모님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알았으면 하시는지, 무엇은 절대 말하면 안 되는지 여쭤보세요. 어떤 이야기가 그 자리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지 부모님이 알고 계신 경우가 많습니다. 당일에는 부모님이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에 서세요.

널리 알려진 형제자매 추도사 두 편에서 배울 점

널리 알려진 형제자매 추도사 두 편은 장례식에서 오직 형제자매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제9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는 1997년 9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누나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습니다. 누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엿새 뒤였습니다. 그는 다이애나의 남동생이었고, 두 사람은 집안의 막내 둘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는 다이애나 곁에 사적인 다이애나를 되찾아 세웠습니다. 어린 시절의 누나, 주말마다 부모님 두 집 사이를 오가던 기차 여행, 런던에서 누나 생일에 마지막으로 만난 일. 그는 “아기였던 저를 엄마처럼 돌봐 준 누나”를 기억했습니다. 또한 누나를 성녀처럼 떠받드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스펜서는 첫 원고가 누나가 어릴 때 잘했던 일들을 늘어놓은 평범한 목록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원고를 내려놓고, 자기가 할 일은 누나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라고 정한 뒤, 실제로 읽은 추도사를 한 시간 반쯤 만에 썼습니다. 2026년 9월에는 누나에 관한 회고록을 펴냈는데,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면 《백조의 노래: 다이애나, 나의 누나》(Swan Song: Diana, My Sister)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2011년 10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월 16일, 스탠퍼드 대학교 메모리얼 교회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소설가 모나 심프슨이 오빠를 위한 추도사를 했습니다. 심프슨은 외동으로 자랐고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오빠를 처음 만났기에, 함께한 어린 시절에서 꺼내 올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심프슨은 오빠의 천재성을 칭송하는 대신,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 병원 복도를 따라 의자를 밀며 걸음 수를 세고 날마다 조금씩 더 멀리 가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2011년 10월 30일 그 전문을 「스티브 잡스를 위한 여동생의 추도사」(A Sister's Eulogy for Steve Jobs)라는 제목으로 실었습니다.

형제자매는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적인 그 사람을 되찾아 올 수 있고, 업적을 늘어놓은 첫 원고는 내려놓아도 됩니다. 복도의 의자처럼 작고 정확한 세부 하나가 어떤 찬사보다 무겁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인생의 늦은 시기에 만났거나 여러 해 연락이 끊겼더라도, 심프슨의 추도사는 여전히 할 말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 형제자매만의 이야기 찾기

안개 낀 해변에 서로 기대어 세워진 빨간 자전거와 파란 자전거
사진: David J. Boozer, Pexels

형제자매만 가진 재료에서 시작하세요. 추도사를 고르기 전에 다음 질문에 답해 보세요.

  • 어디서 자고, 어디에 앉았나요? 같이 쓰던 방, 이층 침대, 긴 귀성길. 형제자매 이야기는 이런 곳 가운데 하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어떤 다툼이 집안의 농담이 되었나요? 부모님이 지금도 꺼내시는 그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생긴 별명. 사람들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어서 가장 좋은 첫머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부모님에 대해 두 사람만 알고 다른 누구도 몰랐던 것은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차 안에서 어떻게 노래하셨는지, 어머니가 화나셨을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이것은 두 사람만 쥐고 있던 재료이고, 추도사 안에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다.
  • 상대가 저지른 일로 누가 대신 혼났나요? 깨진 유리창, 없어진 과자. 형제자매는 이런 장부를 평생 간직하고, 사람들은 오래 묵은 빚이 여러 사람 앞에서 청산되는 장면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 내가 말하면 그 사람이 질색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그런 다음, 그래도 말해도 될 만큼 애정이 담긴 이야기인지 솔직하게 판단하세요. 그 사람의 자녀 앞에서 그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 이야기라면 빼세요.

형제자매에게만 해당하는 단계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다른 형제자매가 있다면 장례식 전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함께 정해 두세요. 한집에서 자랐어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족 안에서 자랐고, 장례식은 그것을 처음 알게 되기에 알맞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다음, 내가 말하는 동안 누가 부모님 곁에 앉아 있을지 정하세요. 그래야 앞에 서서 혼자 부모님을 지켜보지 않아도 됩니다.

들을 수 있을 때 말해 주기

수진의 오빠는 월요일 전화 이야기를 수진이 떠난 뒤 부엌에서 동생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린 시절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세요. 아직 상대가 내 기억이 틀렸다고 따질 수 있을 때. 아무 이유 없이 형제자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세요. 둘 다 기억하는 어느 여름에 대한 솔직한 몇 줄이면 충분합니다. 그 사람은 그 말을 간직할 것입니다.

Goodbye App에서는 아직 곁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편지를 쓰고, 내 목소리 녹음을 하나 더한 다음, 편지가 이메일로 나갈 날짜와 시간을 고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이든, 그 사람의 생일이든, 최대 30년 뒤든 괜찮습니다. 보내지기 전까지는 비공개로 보관되고, 무료이며, 웹과 Android에서 쓸 수 있습니다. 목소리를 녹음해 본 적이 없다면 가족을 위해 내 목소리를 녹음하는 법에 간단한 단계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직접 추도사를 하게 된다면, 미리 소리 내어 읽으며 녹음해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혹시 나 대신 읽어 줄 사람이 내 속도를 미리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형제자매 추도사는 얼마나 길어야 하나요?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자매도 말한다면 2~3분으로 줄이세요. 내 추도사가 중심이 되는 추모의 말이라면 천천히 읽어 3~5분이면 됩니다. 위의 여섯 편은 3~4분 분량입니다. 1분짜리 추도사와 그 길이를 정하는 계산은 짧은 추도사 예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형제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말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어떻게 떠났는지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족이 원인을 밝히기로 했다면 한 번, 꾸밈없이, 자세한 설명 없이 말하고 곧바로 그 사람의 삶으로 돌아가세요. 위의 두 번째 추도사는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사이가 멀어져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하나요? 시작 무렵에 누구도 탓하지 않는 솔직한 문장 하나, 그리고 함께 나눈 어린 시절. 거리를 설명하거나, 나를 변호하거나, 누구 잘못이었는지 넌지시 비치지 마세요. 알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압니다. 다섯 번째 추도사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쓴 것입니다.

부모님이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대신 말하나요?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알았으면 하시는지, 무엇은 절대 말하면 안 되는지 여쭤보고, 부모님이 나를 볼 수 있는 곳에 서세요. 이야기는 먼저 형제자매의 배우자나 반려자, 자녀와 확인하세요. 여섯 번째 추도사가 그 모양을 보여 줍니다.

형부나 매형, 형수나 올케를 위한 추도사에도 쓸 수 있나요? 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우리 가족이 되었는지 한 문장으로 말하고, 친구가 어른이 된 뒤의 세월을 채워 주는 다섯 번째 추도사의 귀 기울이는 문단을 빌려 오고, 마지막 줄은 배우자를 잃은 내 형제자매에게 주세요.

언니나 누나, 여동생의 장례식에서 웃겨도 괜찮을까요? 네, 그 사람이 재미있는 사람이었거나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재미있었다면 괜찮습니다. 놀림은 형제자매가 그 자리에 가져갈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사람도 함께 웃었을 이야기이고, 살아 있는 누구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 사람다운 추도사 예문에는 사람들을 웃게 하려고 쓴 추도사와, 유머가 맞지 않는 때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중간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끝까지 읽어 주면 되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추도사를 울지 않고 읽는 법에서 설명하듯이, 장례식 전에 대신 읽을 사람과 신호를 정해 두세요. 다른 형제자매가 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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